님, 안녕하세요. 여러 ‘날’들로 빼곡한 5월은 잘 보내고 계실까요? 저는 5월이 되고 나서야 제 일상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사 온 지 1년 만에 커튼을 다시 달았고, 얼마 전에는 파주시 월롱에 있는 대형 식물 매장에 가서 화분도 몇 개 들여왔습니다. 깜짝 이벤트로 5만 원짜리 수국을 3만 원에 판매하길래 냉큼 구매했고요. 식충식물인 ‘파리지옥’과 ‘네펜데스’를 찾겠다며 총총 걷는 저희 집 어린이의 뒷모습도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지난 연휴 기간에는 하미나 작가의 『미쳐 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동아시아, 2021)을 읽었습니다. 강화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전자책으로 읽기 시작해 며칠 만에 완독할 만큼 사로잡혀 있었어요. ‘미괴오똑’은 ‘제2형 양극성장애’(조울증) 당사자이기도 한 저자가 우울증을 경험한 젊은 여성들의 인터뷰를 엮은 책입니다. 이 책에는 저자 뿐 아니라 ‘우울증’을 경험한 여성 당사자들의 언어와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남성들이 주류인 정신의학계의 접근법이 이해하지 못했던 ‘여성 우울증의 사회적 맥락’을 밝힙니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요.
나아가 저자는 여성 우울증 환자들이 치료와 분석의 대상만이 아니라, 고통의 탐구자이자 돌봄과 연대의 주체임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경유하면서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무지를 배웠습니다. 제가 저와 함께 살아온 여성들의 고통을 얼마나 얄팍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저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느낄 때마다 차분한 목소리로 “네가 엄마를 이해하라”라던 제 아버지의 조언이 비겁한 합리화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미쳐 있고 괴상하지만, 동시에 오만하며 똑똑한 여자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에 대한 말과 글이 아니라 이들에 의한 말과 글이다. 무엇보다 주요한 의사결정권이 이삼십 대 여성에게 직접 주어져야 한다.” -미쳐 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하미나 저 예스24 eBook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에 대한 말과 글이 아니라 이들에 의한 말과 글이다.” 이 문장 앞에서는 제가 참여하고 있는 ‘세속성자 글쓰기’ 모임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세속성자 글쓰기 모임의 주제는 ‘나의 신앙 여정 돌아보기’입니다. 모임에 참여한 분들의 글을 읽다 보면 ‘참 신기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글들이 그간 한국교회에 관해 들어왔던 그 어떤 말과 글보다도 제 마음을 건드리거든요.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추억이나 교회에 깊은 회의를 품었던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그 시절의 설렘과 기쁨, 고통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들까지도요. ‘나만 그랬던 건 아니었구나’ 싶어 깊은 위로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정말 필요한 이야기가 여기 있구나 하며 호들갑을 떨고 싶어지기도 해요. 이 이야기들이 더 풍성해지고 서로 연결되어서 ‘미괴오똑’처럼 새로운 공론의 장을 만들 미래를 조심스럽게 소망해 봅니다.
흩어져 있었던 고통의 경험들이 언어화될 때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의 진입로 하나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계라니, 말만 들으면 참 근사한데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지요. 나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부끄러움, 내가 누려온 특권을 인정해야 하는 괴로움, 믿어 왔던 가치들이 산산조각나며 발생하는 우울감, 헛살아온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까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는 이 모든 곤란도 포함되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요즘 저는 청어람의 여러 모임과 성서일과 덕분에 용기를 가져 볼 수 있습니다. 저와 같은 두려움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저의 ‘비빌 언덕’이 되어 주고 있달까요.
청어람이 여러분께 그런 곳이 될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홀로 서성이다가도 언제든 들를 수 있는, 불안과 고민을 마음껏 꺼내놓으며 비벼 볼 만한 언덕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세속성자 글쓰기 모임을 유심히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곧 청어람에서 열릴 모임에도 눈길을 주세요. 밀려난 이들의 경험에서 복음의 의미를 다시 배우고 우리 모두의 ‘집’을 구성해 보고자 꾸린 ‘밀려난 이들의 집’, 심각한 기후위기의 절망을 인정하면서도 사랑하고 실천하며 파국 이후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파국 이후의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세계’는 6월 대선을 앞두고 ‘돌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그려보는 시간입니다. 대선 정국에서 빠르게 소비되고 흩어질 말들이 아닌, ‘어떤 사회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로 우리를 데려갈 생생한 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으로 세속성자 글쓰기 모임에서 나온 귀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감사합니다.
“단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느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다고. 특히나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하느님의 뜻을. (…) 조심히 살폈으면 좋겠다. 내게로 향하는 하느님의 뜻은. 나를 향한 연민도, 구차하게 늘어놓는 변명도 아닌, 벌거벗은 채로 우리 둘 사이에서 숨길 수 없는 정직함 앞에서. 그럴 용기가 아직 없는 것을 나는 또 다른 '죄'라고 부르고 싶다.” - Y님